아스트로 피아졸라 피아노 컬렉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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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모노폴리 작성일16-12-09 11:33 조회4,125회 댓글0건본문
제 목 | 아스트로 피아졸라 피아노 컬렉션 2 |
정 가 | 7,000원 |
출판사 | 모노폴리 |
지은이 | 편집부 |
페이지 | 72쪽 |
발행일 | 2007.08.20일 |
ISBN | 9788991952041 |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피아노 작품들을 소개하는 <아스토르 피아졸라 피아노 컬렉션> 제2권. 제1권에 이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계 등 모두 14곡을 선곡하였다. 전체적으로 약간 슬픈 곡들이 많지만 상당히 아름다운 곡들이며, 이외에도 피아노곡으로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곡을 선곡하였다. 오리지널 피아노 악보로 충분히 살릴 수 있는 곡도 있지만, 약간의 수정된 부분도 있다. 탱고,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물론 피아졸라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연주할 수 있도록 주로 중급의 난이도에 맞추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여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가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겨울
미켈란젤로´70
쉴 브 플레
로코를 위한 발라드
부에노스아이레스 오전 0시
콘트라스테스
천사의 죽음
천사의 밀롱가
알프레도 고비의 초상
솔리튜드(고독)
트리스탱고
아스토르 피아졸라는 1950년대 중반 아르헨티나 탱고의 변화를 일으킨 장본인이다. 그는 아르헨티나 대중음악의 변혁을 일으키고 자신의 음악을 누에보 탱고(Nuevo Tango), 뉴탱고(New Tango)라 지칭했다.
1921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근처, 마르 델 플라타에서 태어난 아스토르 피아졸라는 세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 뉴욕의 노동자 지역(당시에는 동부 하층 지역이라 불렀고,지금은 어느 정도 사정이 좋아져 동부 마을이라 부른다)에서 살게 된다.
피아졸라의 아버지는 이발사였고 어머니는 재봉사이자 미용사였다. 이웃 패거리에 끼어 친구들과 싸우던 경험이 그를 강하게 만들었고 이후 음악계에서의 분투를 가능케 했다고 그는 술회한 바 있다. 그의 놀이친구들 가운데에는 헤비급 권투 세계챔피언 록키 마르시아노와 같이 나이가 많은 친구들도 있었다. 그들 중 반은 캘리포이니아 알카트라츠 감옥에서, 나머지 반은 뉴욕의 싱싱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넉넉치 못한 생활 속에서도 피아졸라는 부모의 노력으로 어렸을 때부터 음악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피아졸라의 나이 열살 때 그의 아버지는 반도네온이라는 악기를 사다주었다. 이 악기는 독일에서 수입된 것으로 아코디언과 비슷했고, 후에 아르헨니타 클래식 탱고 밴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피아졸라는 반도네온을 가지고 어렸을 때부터 라디오 연주회에 나가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곤 했다. 1930년대 뉴욕의 영화산업은 스페인어권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영화를 생산해내기 시작했고, 그 주에는 카를로스 가르델의 영화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젊은 피아졸라를 만나게 된 스타 가르델은 스페인어를 구사하며 반도네온을 연주하는 한 어린이와의 조우에 매력을 느꼈다. 가르델은 결국 자신의 영화 '당신이 나를 사랑하게 되는 날(El dia que me quieras)'에 피아졸라를 출연시켰고, 피아졸라는 이 영화에서 연주도 맡게 된다. 1935년 가르델이 사망하기 전에 만든 마지막 영화가 바로 이것이다.
1937년 피아졸라의 가족은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온다. 젊은 아스토르는 유명한 밴드 리더이자 작곡가인 아니발트로일로가 이끄는 작은 탱고 앙상블에 들어가 반도네온 솔로주자로 활동함으로써 음악경력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클래식 작곡가 알베르토 히나스테라의 제자가 되기도 했고, 프랑스에서는 교육자로 잘 알려진 나디아 블랑제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았다. 블랑제는 클래식보다 대중음악 쪽에서 피아졸라의 재능을 발견하고 탱고에 전력 투구할 것을 권했다. 1955년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돌아간 그는 밴드를 결성하고 작곡과 연주에 힘을 기울였다. 그가 만들어낸 음악은 올드 가드 탱고의 요소에 재즈, 클래식 음악에서 받은 영향을 가미한 것이었다. 그는 새로운 음악으로 젊은 청중을 사로잡았으나, 전통적인 탱고 리듬을 포기했다는 이유로 순수한 탱고를 지향하는 이들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 아르헨티나의 군사 정부마저도 그의 음악을 두고 너무나 진보적이라고 난했으나, 광대니, 편집증 환자니 하며 피아졸라를 공격하던 비평가들은 결과적으로 그를 선전하고 그에게 새로운 청중을 얻게 해주었을 뿐이다.
1974년 피아졸라는 아르헨티나를 떠나 유럽으로 향했다. 이후 10년간 그는 유럽에서 활동하며 자신의 음악을 전 세계 청중에게 소개했다. 그의 근거지였던 파리를 비롯하여 빈, 암스테르담, 뉴욕, 도쿄 등지에서 연주와 녹음활동을 하다가 1985년 아르헨티나로 다시 돌아와 1992년 생을 마감했다
현재 뉴욕에는 파아졸라가 어릴 때 살던 동부 9번가와 세인트 마크 거리에 세워진 아파트가 여전히 남아있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반도네온 솔로 주자이자 뉴탱고의 주창자인 그와 연관시킬 만한 동상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자취를 훨씬 넓은 음악계에 남겨 놓았고 그 세계에서 그는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인물이 되었다.
피아졸라는 클래식 탱고에서도 재료를 얻어내어 반도네온을 위한 작품 외에 전통적인 클래식 악기(피아노, 현악기, 플룻, 기타)를 위한 작품도 남겨놓았는데, 그의 음악 어디에나 아르헨티나의 우수가 가득 깃들어 있다. 엄격한 올드 가드의 리듬과 노래 형식을 버림으로써 그는 정체기에 있던 탱고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었고, 수준 높은 작곡, 힘 있는 레코딩과 연주로 뉴 탱고는 대중적인 청중과 클래식 청중 모두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반도네온 연주자로써 피아졸라는 미국의 재즈 비브라폰 연주자 게리 버튼이나 탈리아 스타 가수 밀바 등과 같은 대중음악들과도 함께 연주와 녹음 활동을 했으며 성 누가 오케스트라나 크로노스 현악 사중주단과 같은 클래식 앙상블과도 레코딩 작업을 했다.
글 - 윌리엄 리빙스톤(뉴욕 '스테레오 리뷰'지의 편집장. 1941년 북부 캐롤라이나 애쉬빌에 있는 엘레나 모펫 댄스 학교에서 탱고 1등상을 차지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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